여행지에서 걷는다는 건 언제나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이번에 제가 다녀온 곳은 일본 와카야마현에 위치한 ‘구마노 고도(熊野古道)’라는 순례길입니다. 한자로는 ‘고도(古道)’, 즉 오래된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실제로 이 길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품은 숲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록된 역사 깊은 순례길입니다.
와카야마 여행을 계획하면서 이 순례길은 반드시 걷고 싶었던 코스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자연을 걷는 힐링 코스겠거니 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 이상의 감동과 사색의 시간을 주더군요. 고요한 숲 속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졌습니다.
구마노 고도는 워낙 코스가 많기 때문에, 자신의 체력과 시간에 맞게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다이몬자카(大門坂) 코스와 나치타이샤(那智大社) 근처의 산길을 걷기로 했어요.
다이몬자카는 돌계단이 인상적인 길인데요, 초입부터 267개의 석계단이 이어지며 양 옆으로는 삼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이 펼쳐져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느라 오히려 시간이 더 걸렸어요.
구마노 고도는 단순한 하이킹 코스가 아닙니다. 이 길은 일본 전역의 순례자들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걷던 신성한 길이에요. 길을 걷다 보면 길가에 작은 신사와 돌탑, 안내 표지판이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는 문화재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중간중간 마주친 ‘오지(王子)’라는 작은 사당들은, 순례자의 쉼터이자 기도처로 사용되던 장소라고 해요.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 장면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낸 성당처럼 경건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길이 왜 세계 유산인지, 왜 많은 이들이 천천히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숲은 더 푸르고 촉촉했습니다. 이끼 낀 돌계단과 수풀이 우거진 흙길은 걷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혀 줍니다. 특히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 순간, 이 순례길이 ‘내 안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통로처럼 느껴졌습니다. 와카야마 숲길은 단순히 자연을 느끼는 걸 넘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길이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이 길의 진가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빽빽한 나무들, 부드럽게 깔리는 안개, 조용히 흐르는 산속의 물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침 일찍 숲길을 걷는다면,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 광경 하나만으로도 이 길을 걸을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순례길을 다 걷고 난 뒤에는 근처에 위치한 나치타이샤와 나치폭포까지 이어지는 길도 방문했어요. 폭포 소리와 사원의 종소리가 겹치며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마무리를 선사했습니다. 와카야마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순간은 바로 이 순례길 위에서 보낸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빠르게 흐르지만, 구마노 고도의 숲길을 걷는 동안 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여행지를 넘어선, 깊이 있는 체험이 필요하다면 이 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